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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로마 제국 시대 초기 기독교의 전파와 박해
원래 소아시아(아나톨리아)라고 불렸던 튀르키예는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서기 1세기에 예수의 사도 바울은 지금의 튀르키예에 해당하는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에 교회를 설립하고 기독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에베소, 안티오키아, 필라델피아와 같은 소아시아 도시는 초기 기독교 교회가 있던 중요한 장소였으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개 교회도 모두 이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기존의 신을 믿지 않는 불법 종교로 정의하며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3세기 데시우스 황제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통치 기간에는 기독교인들이 체포, 고문, 처형되는 등 박해가 심했습니다. 이때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지 현장에 가보니 그 때 그절 얼마나 힘들게 신앙을 지켰는지를 알 수 있어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4세기 초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313년)을 공포하면서 박해는 끝났고,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자유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소아시아는 기독교가 크게 확장된 지역으로 성장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로 옮겼고, 기독교는 이 지역에서 국가적으로 보호받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소아시아는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기독교 문화와 학문이 황금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이 시기에 소피아성당과 같은 건축물이 지어졌고 이 지역은 동방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내부에서는 동서 교회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교회는 1054년 서방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분열되었고, 이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동방 정교회를 중심으로 한 비잔틴 제국은 점차 힘을 잃었고, 이슬람 세력은 이를 이용해 소아시아로 진격했습니다. 1071년 셀주크 투르크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를 물리치자 소아시아는 빠르게 이슬람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이 지역에서 사회적, 정치적 입지를 잃었습니다.
2. 종교적 차별과 박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 터키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놓였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이 중심이 된 국가였으며 비무슬림 기독교인은 디미로 분류되었습니다. 비무슬림에게 부과되는 신분인 디미는 기본적인 생활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지만 높은 세금을 납부해야 했고 공직 진출도 제한되었습니다. 특히 데브수르메 제도는 오스만 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정책이었습니다. 데브수르메는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에서 기독교 소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엘리트 군인과 관료로 양성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는 기독교 공동체에 충격을 주었고, 가족과 헤어져야 했던 소년들도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에도 일부 기독교인은 신앙을 지켰지만 사회적 차별과 높은 세금으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이 점진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내부적으로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공존할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밀레 제도를 운영하여 기독교 공동체가 최소한의 자율성을 갖도록 허용했습니다.
20세기 초 터키 지역 기독교인들은 다시 한 번 극심한 박해를 경험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이 사건은 1915년에서 1917년 사이에 발생하여 약 1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하거나 강제로 난민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 '아르메니안 학살'로 알려져 있으며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대량 학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학살 이후에도 튀르키예의 기독교 공동체는 계속 탄압을 받았고,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협정에 따라 약 120만 명의 그리스 기독교인이 튀르키예에서 그리스로 강제 이주당했습니다. 그 결과 튀르키예의 기독교 공동체 수가 급격히 감소했고, 이후 소수의 기독교인이 탄생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이 이주한 후 튀르키예는 이슬람 중심 국가로 더욱 재편되었고,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의 작은 공동체 내에서 신앙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5. 현대 튀르키예의 기독교
오늘날 튀르키예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0.2%에 불과하며, 대부분 이스탄불과 같은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튀르키예는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기독교 공동체가 사회적 차별과 제한에 직면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 교회를 짓거나 기존 교회를 개조하려면 터키 정부의 엄격한 허가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튀르키예를 여행해 보면 기독교 박해 시대에 있었던 곳을 방문하게 되는데 개미굴처럼 만들어진 곳에서 태어나서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 시절 기독교 박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었고, 그 시절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통과 위험을 감수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현재 자유로운 종교의 자유가 있고 본인의 신앙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수 있는 지금 좀 더 절실한 신앙의 모습이 필요하다 느껴집니다.